
질문: 아이티 대지진, 하나님의 책임인가요?
아이티의 대지진으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도 동남아의 큰 지진과 쓰나미 같은 대재앙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을 선별하여 그 재앙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하심인지요? 그곳에도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있을 텐데 모두 함께 희생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와 상관없는 우연한 천재지변으로 보아야 합니까?
답변
1. 대재앙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요?
재난은 예수 재림 징조 중의 하나이다. 마태복음 24장(재림장)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전쟁과 기아과 홍수와 지진 같은 재난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그 빈도가 높아지고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1-5)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말할 때, 이 세상에 재난이 오는데, “잉태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같이” 올 것이다. 잉태한 여인은 태아가 나오는 시간이 가까울수록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되고, 더 자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아기가 태어나는 시간이 가까울수록 고통의 주기가 짧아지고, 고통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오시는 재림의 시간이 가까울수록 고난이 더 자주 오고, 그 크기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고통의 주기 사이의 시간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평안과 안전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빛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게 될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지구 온난화로 인한 대재앙이 우리에게 엄습하고 있는 모습이 거의 날마다 신문에 나오고 있지 않는가? 환경 재앙과 치료가 불가능한 온역이 지구 전체를 엄습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은 깨어서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을 선별하여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을 주려고 하는 것인가?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환경 재난과 온역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로 인한 결과물들이다. 무책임한 오염물질의 방출과 비틀어진 탐욕의 결과로 자연과 동물계가 파괴됨으로써 각종 재난과 질병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사단과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고통들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6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고통이 어디에서 왔을까? 마태복음 13:24~34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우게 되는데, 종들이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하고는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왜 생겼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주인은 밤에 잘 때에 원수가 뿌리고 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고, 종들이 그 가라지들을 뽑자고 제의하자 추수 때까지 놓아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그 비유를 예수께서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밭은 세상이요”(마 13:38)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이 없는 곳으로 창조하셨다. 푸른 풀밭에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기쁘게 노래하며 슬픔과 질병이 전혀 없고 건강과 행복만 가득 찬 곳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원수인 마귀가 거기에 죄와 사망과 고통의 씨를 뿌린 것이다.
3. 재난의 지역에 있는 의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도 함께 희생되어야 합니까?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3:16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딸”이었지만 사단 때문에 18년 동안 고통 당해야만 했던 여인을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3장의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의 책임은 사단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재난과 파괴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의 좋으신 성품을 곡해시켜서 마치 이러한 고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오해케 만들어 인간들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지구를 현재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없는 사람들도 교통사고로 죽고, 암이 걸리며,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예수께서 오셔서 지구를 사단의 손으로부터 구원해주실 때까지 이러한 사고와 재난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허락하시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연이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에스겔이 본 게시와 같이 거룩한 손이 바퀴들 위에 놓여 있고 “바퀴 안에 바퀴가”(겔 1:16) 일하고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형편을 잘 아신다. 우리의 눈이 열릴 수만 있다면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에 역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역사와 상관없는 하나의 우연한 천재지변인가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끄시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에는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성경 절들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는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했으며(벧전 4:12),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기록하였다(딤후 3:12). 또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믿기 어려운 말을 기록하여 놓았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이러한 말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난과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비스러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는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을 준비시켜 주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계 14:12). 구원받을 자들의 특성 중에서 인내야말로 매우 긴요한 것인데, 야고보는 말하기를 인내는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하였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필요한 훈련 과정이다.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했던 다윗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71)
이 단순한 하늘의 원칙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의심과 불신의 안개 속을 헤매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에 대한 의문의 미로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절대로 자신에게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불 가운데로 지나가는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 시험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난 성격들과 이기심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품성과 생애를 정결하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서 죄와 이기심과 무정한 마음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 내는 수술인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고난과 시련은 죄와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고난과 시련에서 오는 슬픔과 충격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로 인한 감정적 스트레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거나 최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일어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안에서 쉬는 것이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허락하신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평안한 확신을 가지고 내 앞에 놓인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비극들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극 저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비극 저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똑같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잘 익은 알곡으로 익어가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그것에 압도되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로 변모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만을 붙들면서 전진해 나가는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다. 어려움은 우리를 예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한다. 고난과 시련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사람들이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붙잡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의 성품과 신앙의 실체는 평안한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평안한 때에 하나님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선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고난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원칙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고난과 슬픔의 순간들을 올바른 자세로 맞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