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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_ 아일랜드의 패트릭, 카톨릭의 성인인가 광야교회의 영웅인가

 

패트릭(A.D.360~)에 관해 알려진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인류 역사상 그보다 더 숭고한 기독교 선교사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아일랜드로 건너온 초기 교회의 자녀이며 사도였다. 패트릭은 브리튼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이 속해 있던 켈트족의 일원이었다나는 육체를 따라서는 자유의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아버지는 우리 지방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나는 나의 고귀한 신분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영광, 곧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의 영광을 위하여 이국땅으로 보내진 그리스도의 종이다.” 소년 시절 노예로 잡혀갔던 패트릭은 문명의 창조자로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한 영웅적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했기에,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했기에, 사로잡혔던 아일랜드로 갔다.

그는 유럽 사회를 개척한 인물이며 동시에 아일랜드 기독교의 아버지이다. 그는 또한 양의 옷을 입고 우리로 들어오는 늑대들을 대항해서 깃발을 높이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꾸며낸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패트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인물, 즉 진짜 패트릭과 가공의 패트릭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의 패트릭이 광야 교회에 속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다죄인이며 신자 중에 가장 거칠고 가장 작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경멸을 받아 마땅한 나 패트릭은 집사였던 칼푸르니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인이 되신 내 할아버지 포티누스는 장로였으며 티베르니아의 바나반이란 마을에 사셨다. 그는 그곳에 한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계셨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내가 잡혀갔다. 그때 나는 거의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 나는 참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나는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끌려갔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당연한 벌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윗글에서 우리는 패트릭의 할아버지가 장로(교황권에서의 주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초기 영국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에게 독신생활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패트릭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집사였으며, 마을의 상담역이었고, 농부이며 남편이었다소아시아의 식민지 주민들이었던 이 켈트족 공동체에 속한 많은 수의 사람이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패트릭 이전 시대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Yeates, East Indian Church History, p. 226

패트릭은 성경을 전파하며 아일랜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에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았다. 당시에 로마 교회는 이미 여러 개의 신조를 승인해서 그것들을 지키도록 명하고 있었지만, 패트릭은 다른 어떤 세상적 권위도 믿지 않았으며, 그 어떠한 신조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간단한 진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종교회의 또는 신조를 그 권위로 삼지 않았다. 후에 성장하여 대학들이 된 그가 설립한 훈련 학교들은 모두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들이었다. 이 학교들의 이름난 학생들은 모두 성경을 자신들의 최고의 권위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콜룸바, 이교 지역이었던 영국에 복음을 소개한 아이단,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자신의 후계자들과 더불어서 기독교를 소개한 콜룸바누스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또한 신자들을 위하여 그 이름들이 널리 알려진 성서 훈련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이 분야에 정통한 한 권위자는 이 학교들에서 만들어진 필사된 성경들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룸이 섬세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정밀하면서도 흠이 없는 이 아일랜드 사본들은 그 어떤 고문서와도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것들이다.” 패트릭은 자신의 서신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무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임을 나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간증한다. 내가 라틴어로 기록한 이 말들은 내 말들이 아니라 거짓을 말씀하신 적이 절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말씀이다.”

패트릭은 그의 모본이신 예수님처럼 성경 말씀을 사람의 가르침보다 더 존중하였다. 그는 그런 면에서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놓아두는 교황권과 차별되었다패트릭은 기독교가 가정과 가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그 힘이 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 조직체는 독신주의를 그 중심으로 하고 있었지만, 아일랜드 교회와 그 교회가 낳은 대영제국과 스코틀랜드, 유럽 대륙에 있던 켈트 교회들은 그렇지 않았다. 패트릭에 의해서 조직되고 발전된 켈트 교회는 그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을 허락하였다. 켈트 교회에서 독신주의가 시행되지 않은 것은 로마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증거였다.